본문 바로가기
살면서 생각하는 이야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알기까지

by 1dann 2022. 8. 11.

어릴 때는 커피 마시는 사람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그 쓴 음료를 아무것도 타지 않은 채로 쭉쭉 들이키는 게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어린 제 입장에서 쓴 커피라는 것은 거의 한약이랑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걸' 마시는 것은 돈을 주고 고통을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한 스물다섯, 여섯때 까지만 해도 커피는 제 돈 주고 사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대신 카페에 가면 스무디나 과일주스를 마시곤 했습니다.

이 정도는 마셔야 돈 주고 마시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취향도 바뀌기 마련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스물여섯이 절반정도 지나갔을 때쯤, 상당히 힘든 회사에 입사하게 되어 만성피로라는 것을 느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말 카페에 자주 갔었습니다.

카페 가는 시간만큼은 회사 직원들이 모두 이해해 주는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도 동기들과 카페에 자주 갔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몽티 같은 걸 주로 마셨습니다.

그 카페의 자몽티는 수제 자몽청을 써서 건더기도 많고 엄청 진하고 달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 며칠 간의 중첩된 야근과 넘치는 업무로 정신이 맑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때도 누군가의 주도로 카페에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날따라 모두가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번 먹어보자 싶더군요.

얼음이 한가득 담긴 라지 사이즈의 아아를 사가지고 회사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맡기듯 털썩 앉았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업무를 하다가 지루해 질때 쯤 사왔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무심코 쭈욱 들이켰습니다.

 

저는 이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개안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눈앞이 환해지고 눈이 선명하게 떠지더군요.

이 맛에 다들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것이라는걸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효과가 너무나도 신기해서 주변에 메신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메리카노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피곤할 때면 찾던 커피는 하루, 이틀을 지나서 거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두 번의 이직을 거치면서 몸은 더욱 나이 들게 되었으니 커피를 더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아침 출근길에는 꼭 커피 한잔이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허황된 멋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회사를 출근하는 저에게는 잠시간의 숨통이었고 피곤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어릴 때 커피를 찾지 않은 이유는 그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니 그 이후에 커피를 찾게 된 것은 커피를 찾지 않고서는 안될 상황과 몸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

한편 씁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가 그동안 몰랐던 맛을 알게 된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소주가 어른의 맛이라고들 합니다.

술에는 큰 취미가 없는 저에게 어른의 맛을 알려준 것은 바로 쓴 커피였습니다.

저는 아마 20대 하고도 중반은 넘어서야 겨우 어른의 맛을 알게 되었나 봅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에게 커피란 여유보다는 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커피를 수혈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아침에 커피가 있었기에 힘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커피가 기호품보다는 필수재의 역할을 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커피도 회사생활이 끝나면서 멀어지더군요.

회사를 나와서 생활하다 문득 생각해보니 일주일에 한 번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면 꼭 필요했던 커피도 회사를 보냄과 함께 그 역할을 다한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가끔 먹고싶을 때 커피를 찾습니다.

피곤한 몸을 일으키기 위한 게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찾고 싶을 때 찾고 즐기고 싶을 때 즐기게 됐습니다.

주변에 가까운 카페에 가서 급하게 내려와 먹는 게 아니라 집에서 나름 태워서 마실줄도 알게 됐습니다.

그게 비록 알 커피에 우유를 타서 마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커피를 직접 만들어서 먹는다는 것은 제게 큰 변화입니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도 이제 슬슬 알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이제 커피를 수혈하기보다는 음미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생각하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기짐 끝에 샌드위치  (0) 2022.08.12
글이라는 것을 적는 것은  (0) 2022.08.10

댓글